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 앙투아네트 (문단 편집) == 평가 == >'''끝나지 않는, 그녀를 둘러싼 진실과 거짓''' >---- >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영화)|마리 앙투아네트]] 중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극도로 이미지가 안 좋았지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당대 여론에 퍼져 있던 대부분의 평판은 부정되고 있는 편이다. '''왕정 시대의 [[프랑스 왕국]]의 [[왕비]]'''로서는 특별히 부적절한 행동이 없었다는 평가. 하지만 시대가 원한 것은 왕정 시대의 [[왕비]]가 아니었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비극이었다. 당시 왕은 새로 부상한 제3계급인 [[부르주아]][* 오늘날 [[부르주아]]라는 말은 부(富)와 사치의 이미지가 덧붙여진 상류층을 뜻하지만, 그 어원은 [[중세]] 작은 [[도시]](bourg)에 거주하며 [[상업]]과 [[수공업]]에 종사하던 [[평민]], 즉 [[사제]]와 [[귀족]] 다음의 제3신분이었다. 중세까지 이들 계급이 역사에 등장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10세기경 [[유럽]]에 자유도시가 생겨나면서 ‘부르주아’라는 말이 이런저런 기록에 얼핏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을 뿐이다. 역사적으로 유럽은 도시와 농촌의 대결이라는 긴장 관계 속에서 발전했는데, 결국 도시가 최종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것은 도시가 가진 부와 행정능력, 도덕성, 특정한 삶의 방식, 혁신적 사고와 행동 덕분이었다. 결국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기능이 도시의 손에서 생겨나고 도시의 손을 거쳐 갔다. 자연스럽게 도시의 주민인 부르주아 계급은 차근차근 부와 지식과 교양을 쌓아가며 계급의 사다리를 오르는 상승 계급이 되었다. 돈과 교양과 여가를 갖고 있던 부르주아 계급은 18세기에 이르러 모든 문학과 학문, 사상을 장악했다. [[계몽주의]] 사상가인 [[볼테르]], [[몽테스키외]], [[장 자크 루소]], [[드니 디드로]] 등이 모두 부르주아 계급이다. 한 번도 역사의 주인공인 적이 없었으므로 그들의 사상이 반(反)역사적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말로 설명하자면, 부르주아 계층이란 현대적인 표현으로 "시민(市民)계층"이다. '기도하는 자'와 '싸우는 자', '일하는 자'의 세 계급으로 구성된 중세 유럽의 사회상은 기본적으로 농촌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기사, 군인이었던 이들이 제 2계급인 귀족으로 영지를 다스리는 실질권력을 행사하고, 지식과 문화권력을 가진 사제들이 제 1계급을 담당하였으며 주로 농민과 같이 실질적인 생산을 담당하는 이들이 제 3계급인 평민으로 이들의 지배 아래 있는 구조였던 것이다. 그런데 막대한 부와 인구, 생산성이 집중된 도시라는 특수한 공간이 나타나 발전하면서 전통적인 1~2계급이 아닌 평민이지만 도시에 집중된 역량을 기반으로 부와 지식을 갖춘 새로운 계층이 나타나 발전하게 되었고, 이들이 바로 성안에 사는 사람, 즉 부르주아라 불리게 된 것. 그리고 중세 이래 전통적으로 유럽의 권력을 가지고 있던 귀족층은 이들 부르주아를 "그래봤자 너희는 평민, 우리의 신하일 뿐이다"라는 관점에서 보았지만 반대로 신흥 부르주아들은 "이제 우리도 너희에게 뒤지지 않는 역량을 갖추었는데, 너희에게 고개숙일 이유가 없다"고 기존의 질서에 불만을 가지고 저항하기 시작했던 것. 이것이 근세 수백년간 유럽을 긴장시킨 기나긴 대립의 단초였고, 결국 여기서 도시와 부르주아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부르주아'는 부와 권력을 가진 상류층의 대명사가 되고, 시민(市民/citizen)은 단순히 도시 거주자가 아닌 정치적 주권을 가진 정치체의 구성원이라는 의미까지 가지게 된 것이다.]에 기대지 않고는 권력을 행사할 수가 없었다. 왕정은 자신의 사법부와 행정부를 이 새로운 계급에 맡겼다. 대혁명 당시 왕실 행정부와 사법부의 90%가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이미 국가를 다 떠맡은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적대 세력, 즉 형식적인 수장(首長)인 왕을 제거하는 일은 지푸라기 허수아비 인형의 목을 베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루이 16세]]가 무능해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치를 해서 등의 해석은 한갓 부질없다. * 다만 "이미 득세한 부르주아에게 귀족층의 형식적인 수장인 왕을 제거하는 일은 허수아비 목을 베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라는 식의 해석은 지나치게 과장된 면이 있으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일단 무엇보다, 근세 유럽 절대왕정기에 국왕과 부르주아 계층의 관계는 그리 적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부르주아 계층의 주된 적대 세력은 중세 이래로 세력을 떨쳐온 대귀족들이었고, 국왕과 부르주와 계층의 관계는 그런 대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한 동맹관계에 훨씬 가까웠던 것이다. 전통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대귀족들을 무력화하고 자신의 손에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해 국왕은 시민계층 지식인 출신의 관료들을 등용했고, 시민계층 출신의 지식인들은 대귀족에 맞설 영향력을 얻기 위해 국왕의 권위를 뒷배로 삼았다. 따라서 루이 16세 시대 왕실 행정부와 사법부의 대부분을 부르주아 계급 출신의 관료들이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은 해당 시기 기준으로 보면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가진 대귀족이 아니라) 국왕의 영향력 아래 있는 시민계급 관료들이 실권을 장악한 절대왕정이 구축되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루이 16세는 부르주아 계급이 주축이 된 혁명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정작 같은 시기 서유럽의 다른 절대군주들은 '''부르주아 계급을 육성하여''' 절대군주권을 강화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테트의 최후가 안타깝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사면초가]]의 [[외통수]]에 빠져 파멸을 맞이했기 때문이 아니라, 만약 그들에게 조금만 더 통찰력이나 결단력이 있었다면 상황을 극복하는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 있었음에도 되려 역으로 그 수단에 당하여 파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 운운은 말할 가치도 없이 하잘것없는 소리지만 루이 16세의 정치적 무능은 확실히 중요한 문제가 맞다. 또한 국왕을 '이미 국가를 장악한 부르주아 계층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적대 세력이자 국가의 형식적 수장'취급하는 것은 프랑스 혁명보다 훨씬 이후, [[봉건제]]에서 [[앙시앵 레짐]] 이래의 구체제와 [[국민국가]]의 대결에서 국민국가의 최종적 승리가 사실상 분명해진 [[근대]] 이후에나 어울리는 평가이지,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대에 나올법한 이야기는 아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발언 중 유명한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프랑스어 원문은 [[브리오슈]]]는 그녀가 무개념이었음을 증명하는 발언처럼 여겨졌지만, 정작 그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원래는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의 한 구절인데 마치 왕비가 한 것인 양 악의적으로 선전되었다. 이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굶주리는 민중의 아픔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비정하고 철없는 왕비가 되어 있었다. 사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라"'''라는 말은 혁명파들이 지어낸 이야기이며 민중의 분노를 이르키기 위한 한 수단이였다. [[프랑스 대혁명]] 발발 4년 전 일어난 마리 앙투아네트 이름을 내세운 희대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도 그녀에 대한 악의적인 루머를 양산시키는 한 계기가 되었다. 전말은 다음과 같다. 출신이 좀 수상한 [[라모트 백작부인]]은 로앙 [[추기경]]에게 왕비의 가짜 편지를 전달한다. 장관 자리를 노리고 왕비에게 접근할 기회를 찾고 있던 추기경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자신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고 착각한다. 실제로 백작부인은 어느 날 밤 [[베르사유 궁전]] 정원에서 왕비를 닮은 한 창녀를 대역으로 삼아 추기경과 가짜 왕비의 밀회를 주선하기까지 한다. 추기경은 깜빡 속아 넘어가고, 백작부인은 자선사업에 쓴다고 속여 추기경으로부터 여러 차례 돈을 받아 가로채기도 한다. 그리고 마침내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고 싶다"는 왕비의 가짜 편지를 전달한다. 추기경은 보석상에게 목걸이를 주문하고, 왕비의 친필 사인이라고 믿은 보석상은 추기경에게 목걸이를 보낸다. 만기일까지 돈이 입금되지 않자 보석상은 왕비에게 청구서를 보낸다. 목걸이는 이미 백작부인의 남편이 가로채 [[영국]] [[런던]]으로 빼돌려진 뒤였다. 창녀는 왕비의 대역을 자백했고, 가짜 편지를 쓴 라모트 백작부인은 태형(笞刑)에 처해진 후 양쪽 어깨에 ‘도둑(voleuse)’의 첫 글자인 v 낙인이 찍힌 채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을 통해 진범이 가려졌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무 상관없음이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공식 재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비에 대한 나쁜 소문들이 무책임하고 악의적인 신문과 팸플릿들을 통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매일 밤 파티만 여는 사치와 향락의 왕비가 되어 있었다. 소문은 점점 더 수위가 높아져, 당시 팸플릿에서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피에 굶주린 괴물 부부로 묘사하기도 했다. 특히 왕비는 온갖 방탕한 쾌락에 몸을 내맡긴 색정광이 되어 있었다. 이성 간의 섹스는 물론이고 대공 부인들이나 사촌 자매 등, 주위의 모든 여자들과 [[동성애]]를 했다는 것이다. 왕비의 섹스 스캔들은 인류 문명의 금기인 [[근친상간]]에까지 이르렀다. 이미 어릴 때 오빠인 오스트리아 황태자 [[요제프 2세]]에게 처녀성을 잃었고, 프랑스로 시집 온 후에는 시할아버지 [[루이 15세]]의 정부가 되었으며, 시동생인 아르투아 백작의 아들과도 연인 관계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적인 패륜(자신의 8살 난 아들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혐의까지 뒤집어썼다. 근친상간 루머는 결국 1793년 10월 12일, 국민 공회에 불려 나온 날까지 그녀의 주요 혐의 중 하나에 이르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흰색의 헐렁한 평민복을 입었고, 신발은 해졌으며, 흰 머리칼은 목 근처에서 덤벙덤벙 잘려져 있었다. 38세의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늙은 노파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몸매에는 아직 왕비로서의 품위와 우아함이 배어 있었다. 왕비는 미동도 하지 읺고 국고 탕진, 내란 음모, 적과의 내통 등 자신의 혐의 내용을 듣고 있다가 8살짜리 아들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마지막 죄목이 낭독되자, 한순간 격한 감정의 동요를 보이며 청중석의 여자들을 향해 몸을 돌리며 “여러분들, 이 말이 믿겨지시나요?”라고 말했다. 이 말에 청중도 술렁였다. 비록 왕비에게 적대적인 평민들이었고, 그만큼 왕비에 대한 동정조차 큰 위험을 내포하는 시대였지만, 많은 여성들이 경악하여 입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순간 왕비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모든 사람들의 돌팔매 속에서 '누군가 내 말을 수긍해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하나라도 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절망적인 사람이 느끼는 편안한 안도감이었다. 나흘 뒤 그녀는 혁명광장[* 현대 [[프랑스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군중의 환호 속에 처형되었다.[* 출처 미셸 모런 마담 투소.] 또 허영심이 가득한 것처럼 묘사되고 있으나, 실지 그녀가 재위 중 사용한 예산은 '''공식적으로 책정된 왕실예산 중 1/10'''에 불과했다. 다만 시기가 워낙 시기였던지라.[* 비난 여론뿐만이 아니라 당시 프랑스의 경제상황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7년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를 복구하기도 전에 [[미국]]이 독립 전쟁을 일으키면서 프랑스가 뭐든 가리지 않고 지원해줬기 때문. 자세한 것은 [[미국 독립 전쟁]] 참조. 게다가 프랑스는 이미 [[루이 14세]] 때부터 [[9년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같은 계속된 전쟁 인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전기를 쓴 프랭크 맥클린은 조제핀 드 보아르네가 황후 시절 사치에 쓴 돈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비로 있던 기간의 10배가 넘었다고 꽤 신랄하게 촌평했다. 후대의 연구자인 안토니아 프레이저는 "그녀의 결점들이 명백하긴 하지만, 그 불행과 저울질해볼 때 하찮은 것에 불과했다"라고 평했다. 다만 프레이저가 역사학자가 아닌 전기작가이며, 영화 <앙투아네트>를 두고 "아름답다! 아름답다!"를 연발할 정도로 앙투아네트에 대해 호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주지해야 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